2007년 10월 19일

'관광 아프리카 뜀틀 될 경기장 증축 비지땀'

검은 대륙 희망 찾기 ⑨ 월드컵으로 뛴다-남아공

권혁철 기자 김태형 기자


»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시내의 사커시티 경기장을 개·보수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은 2010년 월드컵 주경기장으로 쓰일 예정이다. 요하네스버그/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7개국 단일비자 추진으로 통합 기폭제 기대치안 불안·교통난에 백인들 무관심이 걸림돌
지난 8월초 찾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경기장은 증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2010년 월드컵 개막전과 결승전이 열리는 이곳은 7만명 규모 관중석을 9만4천여석으로 확장하고, 비와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지붕을 새로 올리고 있었다.


공사 현장을 둘러보니 곳곳에서 인부들이 터를 파고 철근을 새로 박고 있었다. 타워크레인이 10개나 서 있고 흙을 실은 트럭이 바쁘게 드나들었다. 말이 증축이지 신축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취재진을 안내하던 공사 현장 실무자는 “월드컵 조직위 지침이니까 개·보수를 하지만 다 밀어버리고 새로 짓는 게 비용이 더 적게 들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타보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은 아프리카민족회의(ANC) 홈페이지에 ‘월드컵 개최 준비를 차질 없이 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개최가 불투명하다는 오스트레일리아·영국 언론들의 보도가 잇따르자 대통령이 직접 반박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지난 5월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남아공 월드컵 준비가 지연돼 2010 월드컵 개최지가 변경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해 남아공이 발칵 뒤집어졌다.



» 2010 월드컵 로고 바탕에는 가운데 아프리카 대륙 모양이 있고, 월드컵을 개최하는 남아공 국기의 무지개빛 색깔들이 줄무늬처럼 이를 감싸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을 배경으로 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시저스킥’(일명 오버헤드킥)을 하고 있다. 로고는 아프리카의 탄력과 역동성을 강조한 것이다.

‘남아공 월드컵 회의론’을 털어내기 위해 남아공 정부는 올 상반기에 모든 월드컵 경기장의 공사를 시작했다. 주경기장인 사커시티 등 5곳은 증축하고 5개 경기장은 신축하며, 경기장 근처 교통시설을 개선하는 데 23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사커시티 공사 현장 책임자인 맥스웰 비도는 “2월1일 공사를 시작해 순조롭게 공사를 하고 있으며 2009년 4월23일까지 공사를 마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경기장 개·보수 공사는 남아공 건축기준으로 27개월이면 충분하므로, 2010년 6월11일 월드컵 개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피파 규정을 보면, 월드컵 개최 5개월 전인 2010년 1월까지 경기장 건설을 완료해야 한다.

‘남아공 월드컵 회의론’의 배경에는 경기장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2010 월드컵은 △치안 불안 △인프라(대중교통·숙박) 부족 △자국 국민(특히 백인)의 낮은 관심이라는 ‘삼각 파도’에 시달리고 있다.

월드컵 대회가 열리면 35만명의 축구팬들과 관광객이 남아공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남아공 정부로선 이들을 노린 각종 범죄가 가장 큰 걱정거리다.

유명한 여행안내서인 〈론리 플래닛〉이 “요하네스버그의 밤 거리를 걷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단언할 만큼 남아공의 치안은 악명이 높다. 지난해 살인 사건으로 1만9천명이 숨졌다. 하루 52명꼴이다. 강도는 21만건, 무기를 들고 떼로 저지르는 특수강도는 12만6천건이 터졌다. 특히 아시아인들이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아 한국인과 중국인은 주요 표적이다.

게다가 남아공에는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이 거의 없다. 출퇴근 때 백인들은 대부분 자가용 차량을 몰고 나오고, 흑인들은 행선지별로 7~9인승 승합차에 합승한다. 대기업들은 직원 1인당 매월 약 70만원을 차량 유지비로 지급한다. 차량이 고장나면 출퇴근이 불가능해 차량을 수리하도록 이틀 가량 휴가를 주는게 남아공의 관행이다. 요하네스버그 출퇴근 시간 교통난은 서울을 능가한다. 아침 7시가 넘으면 외곽에서 도심까지 20㎞ 안팎 거리를 가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린다.

남아공 정부는 월드컵 교통 대책으로 요하네스버그공항과 요하네스버그,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를 잇는 고속철도인 하우트레인을 2010년 완공될 계획인데 공사 진척이 더디다. 숙박 문제에선, 피파 기준에 맞는 5만5천개 객실을 확보해야 하는데 현재 2만6천개 승인에 그치고 있다. 부족한 숙소는 민박·야영 등으로 해결해야 한다.

남아공 국민들의 관심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것은 더 큰 걱정거리다. 남아공에서 축구는 흑인 운동이다. 백인은 럭비와 크리켓을 한다. 이런 사정으로 백인들의 관심이 상당히 낮다. 지난 4월 한 여론조사를 보면, 남아공 대표팀이 월드컵 8강에 진출할 것이라는 대답이 60%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백인 응답자의 58%는 8강 진출에 실패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럼에도 아프리카에서 처음 열리는 2010 월드컵은 남아공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남아공 정부는 ‘자랑스러운 남아공’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오랜 인종차별정책으로 악화된 국가 이미지를 개선할 기회로 삼고 있다.

남아공은 월드컵 준비에 530억달러를 쓸 예정이다. 이 가운데 50% 가량이 전력·운송·통신 등 사회기반시설 정비에 들어간다. 월드컵 관련 투자를 통해 2014년까지 일자리 16만개가 새로 생기면, 26%에 이르는 실업률을 반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남부 아프리카 나라들은 월드컵을 관광 산업의 도약대로 삼는다는 계획이다. 월드컵 기간 남부 아프리카 단일 비자도 추진되고 있다. 월드컵 관광객들에게 짐바브웨·나미비아·스와질랜드·보츠와나 등 7개 나라를 자유롭게 관광할 수 있게 하는 비자를 내주는 것이다. 월드컵이 제국주의 분할 지배가 찢어놓은 남부 아프리카의 통합의 촉매 구실을 하고 있다. <끝>

요하네스버그/글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축구 노예상’에 팔려가는 청소년들
푼돈으로 유럽클럽 종신계약…불법 체류


» 요하네스버그 럭비클럽 운동장에서 동네 꼬마들이 공을 차고 있다. 요하네스버그/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지난 8월 초 콩고민주공화국 수도 킨샤사의 동물원 옆. 10대 초반 어린이 12명이 편을 나눠 공을 차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여느 곳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운동화 두 짝을 모두 신은 아이는 1명이었다.

아이들은 3년 뒤 남아공에서 월드컵이 열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국적은 프랑스지만, 콩고에서 나서 자란 클로드 마켈레레(첼시) 같은 유럽 빅리그 선수들의 이름을 아이들은 줄줄 뀄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첼시의 마이클 에시엔(가나)과 디디에 드로그바(코드디부아르), 아스날의 에마뉘엘 아데바요르(토고) 등. 유럽에서 활약하는 대표적인 아프리카 선수들이다. 아이들의 장래 꿈은 유럽에서 축구 선수로 뛰면서 돈과 명예를 움켜쥐는 것이다.

유럽 리그에서 아프리카 선수들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들의 국가대표팀 차출을 놓고 아프리카 대표팀과 유럽 클럽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 2년마다 열리는 ‘2008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이 단적인 예다. 클럽들은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 따라, 대회 시작 2주 전까지 선수들을 아프리카 각국 대표팀에 보내야 한다. 하지만 리그 중간에 핵심 선수를 한 달 넘게 보내야 하는 클럽들이 이를 거부해 다툼이 되풀이된다.

영국 언론들은 이런 갈등을 ‘짊어져야 할 빚’이라고 표현한다. 유럽 빅리그 구단들이 싼 값에 아프리카 선수를 데려와서 활용한 대가를 2년마다 치르는 셈이란 것이다.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나와 유명해지면 몸값이 비싸지기 때문에 에이전트들은 아프리카 각지를 돌아다니며 축구를 잘하는 10대 청소년을 ‘입도선매’한다. 아프리카 축구 유망주들을 발굴해 유럽 클럽에 파는 에이전트들은 ‘21세기 축구 노예상’이라 불린다. 이들은 선수들한테 몸값으로 적은 돈을 주고, 거의 종신계약을 맺기 때문이다.

해마다 아프리카 청소년 몇 천명이 에이전트 소개로 유럽 축구 클럽의 입단 테스트를 받는다. 테스트를 통과하는 청소년은 극소수다. 에이전트들은 테스트에 떨어진 청소년들을 팽개치고, 돌아갈 비행기 삯도 없는 이들은 불법체류자가 돼 유럽의 뒷골목을 떠돈다. 가난과 절망의 탈출구인 아프리카 축구의 또다른 그늘이다.

요하네스버그/글 권혁철 기자, 사진 김태형 기자

‘죽음의 매연’ 유전지대…삶터 되살리기 ‘시동’

검은 대륙 희망 찾기 ⑧ 축복과 저주의 두 얼굴-나이지리아

서수민 기자
» 나이지리아 최대 유전지대인 니제르델타 지역의 한 유정공장에서 24시간 내내 천연가스를 태우고 있다. 니제르델타/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석유매장지 니제르 델타생존위기에 학살까지청년들 환경·인권운동 활발

» 나이지리아
“석유가 나면 우리도 부자가 되는구나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순진했죠.”
세실리아스 조르그(50)는 날마다 10시간씩 얌(마와 비슷한 덩굴성 식물)을 캐는 품을 판다. 얼굴에는 깊은 골이 패여 있고, 깡마른 몸은 막대기처럼 단단하다. 하루 벌이는 한국 돈으로 1000원도 되지 않는다.
조르그를 비롯한 이곳 주민들은 나이지리아 뿐아니라 아프리카를 통틀어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은 거대한 ‘돈방석’ 위에 앉아 있다. 그가 사는 우무에쳄 마을은 세계 최대 석유 매장지의 하나인 니제르 델타 유전지역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보니라이트’ 원유는 황 함유량이 낮아 정제할 필요조차 거의 없는 최고급 원유로 꼽힌다.

이들을 가난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석유다. 마을 사람들은 1958년 석유가 발견된 뒤 더욱 살기 어려워졌다고 입을 모은다. 조르그는 “송유관에서 석유가 새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됐어요. 개울에 기름이 돌며 물고기가 사라졌고요”라고 말했다. 마을 하늘 한쪽은 유정에서 태우는 천연가스의 불길로 1년 내내 타오른다. 불길이 내뿜는 열기와 매연으로 마을을 에워싼 숲도 서서히 사라졌다.


우무에쳄 사람들은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 중앙정부가 석유 산업에서 나온 수익을 독점하고, 땅 주인에 대한 보상이나 배상을 거의 하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놓은 토지법 때문이다.
1990년 11월, 가난과 오염에 지친 우무에쳄 사람들은 다국적기업 쉘과 나이지리아 정부가 함께 운영하는 유정 앞에서 생계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평화롭게 시작했지만, 정부군이 주민들에게 총을 쏘며 전쟁으로 변했다.

» 나이지리아 석유생산과 소비현황
“그들은 여자나 어린이한테도 총을 겨눴어요. 우리 남편도 그때 죽었고요.” 조르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학살 뒤 나온 정부 조사단의 공식 보고서조차 “주민들의 삶이 유전으로 심각히 파괴됐다”고 지적하며 시위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현지말로 ‘평화의 마을’을 뜻하는 이곳의 학살로 모두 80명이 목숨을 잃었고 집 500여채가 잿더미로 변했다.




17년이 지난 2007년, 우무에쳄은 여전한 가난에 시달린다. 원유값은 그새 갑절 이상 올랐지만, 마을 사람들은 전기는커녕 깨끗한 마실 물조차 없다. 1만명이 사는 마을과 주변 지역에는 제대로 된 병원이나 중·고등학교 한 곳도 없다. 일자리가 없어 똑똑한 청년들도 무장 반군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우무에쳄은 세계 8대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의 모순을 집약해 보여주고 있다. 변호사 페스투스 케야무는 북부 하우자족이 정권을 장악해, 석유가 나는 남부의 이조족들을 자원에서 소외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조족인 그는 “기독교 신자가 대부분인 이조족과 무슬림인 하우자족 등 독립 이전 한 나라로 살아본 적이 없는 250개 부족을 억지로 묶은 게 나이지리아”라고 주장했다.



정치 평론가 요가마 엔주마는 “나이지리아는 자원 부국이어서 민주주의가 더욱 꽃피우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현금화가 쉬운 석유라는 막대한 부 때문에 소수 엘리트들이 국민들에게 권력을 나눠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나이지리아의 경제는 석유에 대한 높은 의존도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다른 산업의 성장이 억제돼 왔다. 석유가 ‘검은 저주’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 나이지리아 최대 유전지대인 니제르 델타 지역 시민단체의 포스터. 흘러든 기름 때문에 바다가 어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게 오염돼 있다. 우무에쳄/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 라고스의 나이지리아 국립대학에서 학생들이 모여 음악 연습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전설적인 음악가 펠라 쿠티를 음악적 스승으로 생각한다. 라고스/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하지만 2007년 나이지리아에서는 유례없는 실험이 진행 중이다. 지난 7월 출범한 우마루 야라두아 정부가 사상 최초로 이조족 출신 조나산 굿럭을 부통령으로 임명하고, 무장 반군 사령관 도쿠보 아사리를 석방하는 등 니제르 델타 지역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야라두아 대통령은 또 세금·선거제도 정비와 부패 척결을 선포하며 나름의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학살 뒤 10년 넘게 침묵을 지켜온 우무에쳄 주민들도 조금씩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고향에 돌아온 젊은이들과 외국 시민단체들의 연대로 환경·인권운동이 활성화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총기를 들고 분리 독립을 주장하거나, 외국인들을 납치해 돈을 버는 무장단체들의 힘이 더 세지만, 무장단체들의 활동에 미래가 없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우무에쳄 환경인권개발센터(CEHRD)의 간사인 전직 탐사보도 기자 패트릭 나그반톤은 민주화 운동으로 실형을 산 뒤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이 가운데 한명이다. 그의 단체는 △석유로 인한 환경오염과 소형총기 실태조사 △에이즈 퇴치 운동 △유권자 교육운동 등을 벌여왔다. 나그반톤은 “니제르 델타에는 여전히 비폭력보다는 폭력, 이성보다 신을 믿는 이들이 더 많다”며 “하지만 국민들의 자긍심과 역량 향상만이 석유의 저주를 석유의 축복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무에쳄·포트하코트(나이지리아)/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펠라 쿠티의 멈추지 않는 노래



민중 삶 대변한 ‘음악 대통령’만독재·반자본주의로 대중적 사랑


» 펠라 쿠티

“그들은 모두 기자의 친구, 위원장의 친구, 비서의 친구, 장관의 친구, 대통령의 친구라네. 절도에 부패, 물가인상과 혼란, 억압이 그들의 일. 마치 오바산조와 아비올라처럼. 그들은 국제적인 도둑, 도둑이라네.” (펠라 쿠티, ‘인터내셔널 시프 시프’(International Thief Thief))

제국주의와 독재, 부패에 시달려온 나이지리아는 이런 아픔을 예술로 승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윌레 소잉카부터 오고니족 투쟁으로 유명한 시인 켄 사로위와, 탈식민지 문학의 거장인 치누와 아체베는 모두 나이지리아 출신이다.

그러나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예술가는 펠라 쿠티다. ‘아프로비트’의 창시자로도 유명한 펠라 쿠티의 삶은 군부독재에 맞선 나이지리아 민중의 처절한 투쟁과 그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38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펠라는 유학을 떠난 1950년대 후반 영국에서 밴드를 결성했다. 60년대 영국과 나이지리아, 미국을 오가며 활동한 그는 ‘검은팬더당’ 등 흑인 민권운동에 눈을 뜨며 더욱 급진화된다. 사회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의 지지자였던 그의 노래는 국민들을 헐벗게 만드는 독재와 자본주의 비판에 거침이 없었다. 그는 자택 겸 스튜디오를 ‘칼라쿠타 공화국’이라고 선포하며 자유롭게 마약을 하고, 삶을 즐겼다. 그의 콘서트마다 수만명이 몰려들었다.

그의 거침없음과 대중적 영향력은 펠라를 정권의 최대 눈엣가시로 만들었다. 77년 군부를 겨냥한 앨범 <좀비>가 대성공을 거둔 뒤 찾아온 군인들은 그의 어머니를 발코니 밖으로 던져 살해했고, 칼라쿠타 공화국을 불태웠다. 가까스레 살아남은 펠라는 어머니의 관을 라고스 군부대 앞으로 보내며 이들을 비판하는 노래 두 곡을 작곡했다.

펠라는 무엇보다 위대한 음악가로 기억된다. 그는 재즈와 아프리카 전통 비트를 결합한 ‘아프로비트’라는 새 음악 장르를 창시했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노래가 이해되도록, 문법에는 맞지 않지만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피진 영어’를 쓴 펠라의 음악은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이 됐다.
펠라가 97년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뜬 지도 10년이 지났지만, 팬들의 사랑은 여전히 뜨겁다.

사람들은 펠라의 음악이 단순히 음악을 넘어 아프리카 사회 전체의 미래를 내다봤다며 그를 ‘예언자’라고 추앙하고 있다.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비비시>(BBC) 게시판에 한 미국인 팬은 “선구자이며 음악 천재였던 그의 음악은 오늘날도 전세계 모든 흑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는 댓글을 남겨놨다.

라고스/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제3세계 동지’ 신뢰…주요 인프라 ‘중국제’

검은 대륙 희망 찾기 ⑦중국, 적인가 동지인가

권혁철 기자 서수민 기자


» 수단의 수도 하르툼의 한 건설 현장에서 함께 일하던 중국 노동자와 현지인들이 취재 협조를 구하자 웃음을 지었다. 하르툼/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아프리카의 관문 구실을 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오아르(OR) 탐보공항. 보안검색 요원이나 항공사 승무원들은 눈길이 마주치는 동양인들에게 “니하오”(안녕) “쎄쎄”(감사) 등의 중국말 인사를 건네기 일쑤다. 느닷없는 중국인 취급에 한국인이나 일본인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이 얼마나 활발한지를 잘 보여준다.
<한겨레> 취재진이 아프리카 시골 마을에 가면 난생 처음 동양인을 보는 어린이들이 몰려들어 “시나”(중국인)라고 외치곤 했다. 60·70년대 일본이 부상할 때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이 동양인을 보면 으레 일본 사람인지를 묻던 것처럼, 요즘 아프리카에서는 ‘동양인=중국인’이라는 등식이 굳어져 있다.

70년대부터 무상원조 공세…전지역서 ‘차이나 바람’
자원 놓고 미와 패권다툼…현지 노동력 안써 불만도


» 아프리카 원유 하루 생산량 / 중국-아프리카 국가별 무역 규모

아프리카 나라들의 주요 산업 기반은 대부분 ‘중국제’다. 대표적 사례가 수단이다. 수단은 산유국이면서도 정유시설이 변변찮아 오랫동안 정유된 석유를 수입해왔다. 수단을 본격적인 석유 수출국으로 부상하게 만든 1등 공신이 하르툼 정유공장이다. 이 정유공장은 해마다 10% 대에 이르는 고도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남아공과 이집트 사이에 있는 유일한 정유공장인 이 공장은 중국국영석유회사(CNPC)와 수단 광업에너지부가 합작해 2000년에 완공했다. 정유 규모가 연간 250만톤이며, 항공기용 제트 에이(A)유, 중유, 엘피지도 생산한다. 이 공장 가동에 필요한 기술은 모두 중국이 제공한 것이며, 기술자들도 대부분 중국인이다. 수단의 수도 하르툼은 온 시내가 중국판이다. 하르툼에서 만난 한 수단인은 “서구와 달리 중국은 정치에 간섭하지 않고, 비즈니스를 안다”고 말했다.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은 1950∼60년대부터 시작됐다. 제3세계 외교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다. 중국은 아프리카의 전통적 우방으로 70년대부터 꾸준히 무상 원조 공세를 폈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중국이 건설한 관공서 건물, 체육관, 병원, 도로, 주택, 학교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쌓은 신뢰가 중국의 본격적 해외 진출에 윤활유로 작용한다. 아프리카 진출에서 중국은 서방 국가들보다 휠씬 유리하다. 아프리카인들은 과거 식민지배의 기억으로 유럽이나 미국의 백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반면, 중국에 대해서는 50·60년대 비동맹 운동을 함께 했고, 독립 투쟁을 도와준 우호국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무비아이 응카샤마 콩고 대통령 에너지·광업 담당수석비서관은 “유럽 사람들은 아프리카를 속여왔다”고 말했다.

중국이 금융·기획·설계·감리 등을 한번에 해결해주는‘턴키’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중국을 선호하는 이유다. 특히 중국은 인권 개선, 민주주의와 같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지 않는다. 중국은 내정불간섭의 원칙에서 독재, 인권 탄압, 부패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 이른바 ‘베이징 컨센서스’란 전략을 펴고 있다. 중국은 내전이나 인권 탄압으로 악명이 높은 나라들에도 무기를 팔고 경제 지원책을 펴고 있다.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에 맞서기 위해 ‘동쪽을 보자’(Look East)는 구호를 내세우며 친중국 정책을 들고 나왔다.

중국이 환영만 받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 값싼 중국산 제품을 들여와 아프리카 산업 기반을 약화시키고 자원을 약탈하는 제국주의란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콩고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은쿠무 프레이 룽굴라 박사(인류학)는 “중국인들이 도·소매상 등 소규모 유통을 장악해 돈벌이에만 신경 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국이 현지 노동력을 전혀 쓰지 않는 것도 불만을 사고 있다. 중국은 공사 계약을 하면 현장의 허드렛일 인부들까지 중국인을 데려와 합숙하며 일을 한다. 이렇게 아프리카에서 일하는 중국 노동자가 7만∼8만명 가량인 것으로 추정된다.

잠비아 수도 루사카에서 북쪽으로 300㎞ 떨어진 참비시는 중국이 8억달러를 투자해 경제무역 특구로 키우는 곳이다. 지난 2월 잠비아를 방문한 중국 후진타오 국가 주석이 이곳을 방문하려다 불상사를 걱정해 포기했다. 참비시가 아프리카에서 반중국 감정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 콩고 킨샤사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콩고 사람들이 중국행 비자를 받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킨샤사/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2002년 참비시의 구리 광산을 인수한 중국 경영진은 노조탄압을 일삼고 작업장 안전은 팽개쳤다. 지난해 7월 잠비아 광부들이 임금 체불 항의 시위를 하자, 중국인 감독관이 총을 쏴서 46명이 숨졌다. 격분한 잠비아인들이 곳곳에서 중국인 상점들이 습격하는 등 반중 감정이 거세졌다. 지난해 가을 대통령 선거 때 야당 후보인 마이클 사타가 당선에 실패했지만, “중국인들을 몰아내자”며 반중감정에 호소하는 선거운동으로 28%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올 상반기에 나이지리아 유전지대에서 무장세력이 중국인 25명을 납치했고 9명을 죽였다. 유전 습격 현장을 본 사람들은 무장세력이 중국인들한테 집중 사격을 했다고 증언했다. 중국이 지역 특성이 강한 아프리카 실정를 고려하지 않고 중앙 정권과 유착해 석유 이권을 챙기다 현지인들의 반발을 사는 것이다.

중국은 자국 원유 공급의 30%를 아프리카에서 조달하고 있다. 중국의 아프리카 전략 초점은 석유와 광물 등 자원 확보다. 특히 아프리카 석유 자원를 놓고 미국과 벌이는 주도권 다툼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전철을 밟는 ‘아프리카 패권 경쟁’이란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

킨샤사·하르툼/권혁철 서수민 기자 nura@hani.co.kr


■ 베이징 컨센서스는 정밀한 이념이라기보다는 미국 주도의 워싱턴 컨센서스에 도전하는 개념이다.
1990년대 미국은 남미 국가의 경제위기 해법으로 세제개혁, 무역·투자 자유화, 탈규제화 등 10가지 정책을 내놨다. 미국의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이 명명한 워싱턴 컨센서스는 미국 주도 신자유주의의 대명사가 돼, 세계화 바람을 타고 힘을 얻었다. 90년대 후반 한국 경제 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 개혁 요구도 워싱턴 컨센서스의 하나다.

2004년 골드만 삭스의 고문이며 중국 칭화대 라모 교수가 처음 제기한 베이징 컨센서스는 정치적 자유화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시장경제적 요소를 최대한 도입하는 중국식 발전국가 모델을 뜻한다. 중국 경제 발전 경험을 정리한 베이징 컨센서스는 구체성이나 실천성 면에서 워싱턴 컨센서스에 비해 뒤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워싱턴 컨센서스와 달리 베이징 컨센서스는 내정 불간섭의 원칙 아래 권위주의체제를 인정하면서 발전전략을 제시한다. 서방이나 국제기구의 개혁 요구에 거부감이 있는 수단, 짐바브웨 같은 아프리카 국가에게는 호소력이 있다.

Sembel Residential Complex Asmara

Sembel Residential Complex Asmara

The city is developing in a dramatic pace, especially in the housing sector. Sembel Residential Complex is one of Africa's biggest housing complexes, which houses about 1250 families.

Sembel Residential Complex was built in 1996 by Keangnam Enterprises, Korea's first contractor. It is therefore also known as Corea. The complex is situated in the South-west of Asmara. There are shops, a hospital, a kindergarten, an elementary school, a gymnasium, playgrounds, sport facilities (tennis court, football & basketball) a round theater, offices and little squares to meet & rest.



Sembel Residential Complex Polyclinic and Social Center


Gymnasium, elementary school, kindergarten and festival facilities



Sembel Residential Complex Shopping Center, Social Center and Hospital.

Eritrea finds new ways to earn hard currency

Eritrea finds new ways to earn hard currency
Thursday 22 June 2006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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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1, 2006 (ASMARA) — It may look like a truck park by Asmara’s Halibet Hospital on the edge of town, but the Eritrean government, keen to tap the hard currency held by the large Eritrean diaspora, has other plans.

The poor Red Sea state plans 766 "new residential-style" two and three-bedroom apartments there, with shopping centres and sports facilities, the project’s Web site halibet.com says.
The prices, between $97,000 and $139,000, are low by London and New York standards, but out of reach for most Eritreans whose average income is just $130 per year.

Glossy brochures are available in Eritrean embassies abroad and payment can be made in U.S. dollars, euros and British pounds but not in nakfa, the national currency.

The government has hard currency reserves equal to only one month of imports, according to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and must find innovative ways of earning crucial cash.
"This economy lives off two things: diaspora and loans," an Asmara-based analyst told Reuters, adding that Eritrea paid 50 times more for imports in 2003 than it earned from exports.
The currency crunch is due partly to a collapse of trade with neighbours Ethiopia and Sudan, a fixed exchange rate and the fact that most foreign exchange transactions take place outside official channels, the IMF says. Reduced donor loans have also contributed.

The crisis may ease in 2008, when Eritrea is expected to start mining gold and other minerals worth tens of millions of dollars a year.
Meanwhile Eritrea, whose mantra is self-reliance, suffers from tension with its giant neighbour Ethiopia, with which it fought a border war in 1998-2000 and rising world oil prices.
It needs hard cash to pay for food, oil and arms.

DIASPORA

Total public debt reached 214 percent of gross domestic product (GDP) by end-2004, divided almost equally between external and domestic liabilities, according to the IMF.
Eritrea has been exploring the possibilities for debt relief in discussions with the IMF but no agreements have yet been signed, diplomats say.
Loans have come from financial institutions such as the World Bank and bilateral donors, including the United States, China, Italy and Middle Eastern countries.
A key source of foreign currency is Eritrea’s sizeable diaspora, many of whom live in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They make donations to the families of those killed in the border war, and pay a two percent income tax to qualify for privileges back home, like the right to buy housing and land.
But payments are declining as younger Eritreans’ interest in their homeland dwindles, analysts say. "Payment is restricted to a minority of diaspora members who want to maintain financial and economic links to the homeland," one analyst said.
Another cash earner is private family transfers.

"Without remittances, I don’t think anybody could get by," said a young woman, who did not wish to be named. "Most people in Eritrea have somebody outside (the country)."
Economists estimated that in 2003, remittances were worth around 70 percent of Eritrea’s GDP.

Diplomats say they fell from $462 million in 2003 to $420 million in 2005.
Some Eritreans abroad still want to help their country.
"As a kid, I remember EPLF delegates coming to update us on developments in the field," said Senai Maesho, 39, who lives overseas, referring to the guerrilla group which led a 30-year struggle for independence from Ethiopia, won in 1993.
"We were made aware that if we didn’t contribute (to the struggle) then our political independence would be hijacked by surrounding countries," he said, while holidaying in Asmara.

CONTROLLING EXCHANGE PROCESS

Eritrea also uses strict controls to boost its foreign currency holdings. "You get dollars sent to your bank account here, but you can only withdraw in nakfa," an analyst said. Unauthorised use of foreign currency is punishable by confiscation, a two million nakfa ($133,000) fine and two years in prison.

Government approval is required to pay for international transactions with foreign currency. A maximum $150 per day can be taken out of the country for foreign travel and companies with foreign exchange earnings need permission to remit them.
The World Bank says Eritrea’s economy has the potential to grow by 4 percent annually, well above rates of under 2 percent recorded in the last two years. "Poverty remains pervasive, defence spending large and fiscal deficits and government debt are at unsustainable levels," the IMF says.

The unresolved border dispute with Ethiopia keeps defence spending high. Eritrea blames the international community for not forcing Ethiopia to demarcate the border under the terms of the peace deal that ended a war which killed 70,000 people.
For some Eritreans, the Halibet project is an example not of a cash-strapped economy seeking solutions to a currency crisis, but of a proud young nation proving itself to the world.

"Whenever our enemies ... pray for our failure, we always surprise them with extraordinary achievements," boasts a comment posted on the project’s Web site.

The country representative for the project’s South Korean contractor, Keangnam, said customers were coming. "They’re buying, paying money, registering," Nam-Hun Kang said. "Very promising."

(Reuters)

Eritrea sells luxury houses to earn hard currency

Eritrea sells luxury houses to earn hard currency

It may look like a truck park by Asmara's Halibet Hospital on the edge of town, but the Eritrean Government, keen to tap the hard currency held by the large overseas Eritrean community, has other plans.

The poor Red Sea state plans 766 "new residential-style" two and three-bedroom apartments there, with shopping centres and sports facilities, the project's website halibet.com says.
The prices, between US$97,000 and US$139,000, are low by London and New York standards, but out of reach for most Eritreans whose average income is just US$130 per year.
Glossy brochures are available in Eritrean embassies abroad and payment can be made in US dollars, euros and British pounds but not in nakfa, the national currency.

The government has hard currency reserves equal to only one month of imports, according to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and must find innovative ways of earning crucial cash.
"This economy lives off two things: diaspora and loans," an Asmara-based analyst said, adding that Eritrea paid 50 times more for imports in 2003 than it earned from exports.

The currency crunch is due partly to a collapse of trade with neighbours Ethiopia and Sudan, a fixed exchange rate and the fact that most foreign exchange transactions take place outside official channels, the IMF says. Reduced donor loans have also contributed.
Meanwhile Eritrea, whose mantra is self-reliance, suffers from tension with its giant neighbour Ethiopia, with which it fought a border war in 1998-2000 and rising world oil prices.
It needs hard cash to pay for food, oil and arms.

Loans have come from financial institutions such as the World Bank and bilateral donors, including the United States, China, Italy and Middle Eastern countries.
A key source of foreign currency is Eritrea's sizeable overseas population, many of whom live in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They make donations to the families of those killed in the border war, and pay a two per cent income tax to qualify for privileges back home, like the right to buy housing and land.
But payments are declining as younger Eritreans' interest in their homeland dwindles, analysts say. "Payment is restricted to a minority of diaspora members who want to maintain financial and economic links to the homeland," one analyst said.
Another cash earner is private family transfers.

Economists estimated that in 2003, remittances were worth around 70 per cent of Eritrea's GDP. Diplomats say they fell from US$462 million in 2003 to US$420 million in 2005.
Some Eritreans abroad still want to help their country.

"As a kid, I remember EPLF delegates coming to update us on developments in the field," said Senai Maesho, 39, who lives overseas, referring to the guerrilla group which led a 30-year struggle for independence from Ethiopia, won in 1993.

"We were made aware that if we didn't contribute (to the struggle) then our political independence would be hijacked by surrounding countries," he said, while holidaying in Asmara.
For some Eritreans, the Halibet project is an example not of a cash-strapped economy seeking solutions to a currency crisis, but of a proud young nation proving itself to the world.

The country representative for the project's South Korean contractor, Keangnam, said customers were coming. "They're buying, paying money, registering," Nam-Hun Kang said. "Very promising."

Source: China Daily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대한민국 노무현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의 합의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였다.
방문기간 중 역사적인 상봉과 회담들이 있었다.
상봉과 회담에서는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남북관계발전과 한반도 평화, 민족공동의 번영과 통일을 실현하는데 따른 제반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협의하였다.
쌍방은 우리 민족끼리 뜻과 힘을 합치면 민족번영의 시대, 자주통일의 새시대를 열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표명하면서 6.15 공동 선언에 기초하여 남북관계를 확대·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6.15 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 나간다.남과 북은 우리민족끼리 정신에 따라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며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중시하고 모든 것을 이에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6.15 공동선언을 변함없이 이행해 나가려는 의지를 반영하여 6월 15일을 기념하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남북관계를 상호존중과 신뢰 관계로 확고히 전환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않으며 남북관계 문제들을 화해와 협력, 통일에 부합되게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남북관계를 통일 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각기 법률적·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남북관계 확대와 발전을 위한 문제들을 민족의 염원에 맞게 해결하기 위해 양측 의회 등 각 분야의 대화와 접촉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하였다.남과 북은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며 분쟁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해결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 어떤 전쟁도 반대하며 불가침의무를 확고히 준수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서해에서의 우발적 충돌방지를 위해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이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과 각종 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조치 문제 등 군사적 신뢰구축조치를 협의하기 위하여 남측 국방부 장관과 북측 인민무력부 부장간 회담을 금년 11월중에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남과 북은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위한 투자를 장려하고 기반시설 확충과 자원개발을 적극 추진하며 민족내부협력사업의 특수성에 맞게 각종 우대조건과 특혜를 우선적으로 부여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해주지역과 주변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개성공업지구 1단계 건설을 빠른 시일안에 완공하고 2단계 개발에 착수하며 문산-봉동간 철도화물수송을 시작하고, 통행 통신통관 문제를 비롯한 제반 제도적 보장 조치들을 조속히 완비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공동으로 이용하기 위해 개보수 문제를 협의·추진해 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안변과 남포에 조선협력단지를 건설하며 농업, 보건의료, 환경보호 등 여러 분야에서의 협력사업을 진행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남북 경제협력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현재의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로 격상하기로 하였다.

6. 남과 북은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빛내기 위해 역사, 언어, 교육, 과학기술, 문화예술, 체육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남과 북은 백두산관광을 실시하며 이를 위해 백두산-서울 직항로를 개설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2008년 북경 올림픽경기대회에 남북응원단이 경의선 열차를 처음으로 이용하여 참가하기로 하였다.

7. 남과 북은 인도주의 협력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흩어진 가족과 친척들의 상봉을 확대하며 영상 편지 교환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금강산면회소가 완공되는데 따라 쌍방 대표를 상주시키고 흩어진 가족과 친척의 상봉을 상시적으로 진행 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자연재해를 비롯하여 재난이 발생하는 경우 동포애와 인도주의, 상부상조의 원칙에 따라 적극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8. 남과 북은 국제무대에서 민족의 이익과 해외 동포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하였다.남과 북은 이 선언의 이행을 위하여 남북총리회담을 개최하기로 하고, 제 1차회의를 금년 11월중 서울에서 갖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들을 협의하기로 하였다.

2007년 10월 4일

평 양

대한민국 대통령 노 무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 정 일

“두바이 개발붐 2009년 부터 위축”

“두바이 개발붐 2009년 부터 위축”

두바이의 개발붐이 내년 하반기 이후에는 위축되기 시작하겠지만 그 시기가 2009년으로 다소 늦춰질 것이라고 파이낸셜 타임스가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은 대형 개발 프로젝트 발주가 연기되는 등 두바이 개발붐 위축이 예상되고 있지만 외국인 유입으로 연평균 5만 채의 신규주택이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에 실제 가격 조정은 2009년쯤 이뤄질 것이라고 관측했습니다.

두바이 현지은행인 EFG-에르메스는 부동산 가격이 내년 하반기부터 진정되기 시작해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정이 시작돼 2011년쯤에는 15-20% 정도 떨어질 전망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국제] 서영민 기자 입력시간 : 2007.09.28 (16:52)

스타벅스? 처음 듣는데…에티오피아선 커피 한잔에 3원

원두값 쥐락펴락 대기업만 ‘뱃살’‘양심 커피’ 한잔이 공정무역 희망

서수민 기자


» 에티오피아 남부 고원지대 야부나 마을의 어린이들이 바구니에 주워 담은 커피 열매를 보여주고 있다. 뒤로 보이는 나무들이 커피나무다. 지마/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스타벅스? 처음 듣는 이름인데….”
농부 아토모코릴(50)은 호기심에 눈을 깜빡였다. “스타벅스는 가장 유명한 커피 체인점이며, 거기선 커피 한잔을 4~5달러에 판다”고 설명하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걸 마시는 사람들이 가엾군. 여기서는 커피 한잔에 3에티오피아 센트(약 3원)면 되는데…”
아토모코릴을 만난 곳은 커피나무가 울창한 에티오피아 지마 지역 야부나 마을의 숲속 과수원이었다. 이곳은 커피의 원산지 에티오피아에서도 ‘커피의 수도’로 꼽힌다. 고급 커피로도 유명한 ‘시다모’와 ‘이르가체페’의 부근이다. 에티오피아인의 커피에 대한 자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토모코릴도 예외는 아니었다. “커피는 우리에게 삶 그 자체다. 우리가 커피를 사랑하는 만큼 커피도 우리를 돌봐준다고 믿는다.” 옆에서는 10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 딸들이 바람에 떨어진 열매를 줍고 있었다. 그는 과수원 가장자리로 가더니 “이 나무는 100살이 넘었지만 매년 열매가 열린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커피가 그의 사랑에 항상 보답한 것은 아니었다. 불과 7~8년전, 이 마을의 나무에는 잘 익은 커피 열매 대신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재앙같은 커피값 폭락 때문이었다. 1㎏에 3비르(약 300원)하던 커피값이 0.5비르(50원)으로 떨어졌다. 한주에도 몇 집씩 야반도주를 했고, 아이들은 학교는커녕 병원도 가보지 못하고 죽었다.

»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 거리에 붙어 있는 커피 조합 포스터. “공정한 커피 무역으로 빈곤의 순환을 깨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아디스아바바/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가격폭락 ‘재앙’에 공동체 붕괴 아픈 경험다국적기업 맞서 유기농·직수출 조합 결성
국제 커피값은 1989년 미국이 국제커피조합(ICA)에서 탈퇴한 뒤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으로선, 냉전 붕괴 뒤 가난한 커피 생산국들의 수입을 보장해 이들의 사회주의화를 방지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구호단체 옥스팜은 현재 전세계 커피 수요에 견줘 공급이 8% 정도 웃도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마의 농부들이 목숨을 끊던 그 무렵,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커피산업 담당 공무원 타데세 메스켈라는 국외 커피시장 동향을 살펴보고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커피값은 몇 년째 바닥을 치고 있었지만, 커피를 가공해 내다파는 다국적 기업들은 더욱 부유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 농부의 아들인 그는 이런 부조리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많게는 150번이나 손이 바뀌는 커피의 유통과정과, 그 과정에서 전 세계 커피시장을 장악한 다국적 대기업들이 얻는 이익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메스켈라는 99년 6월, 35개 지역 커피조합을 모아 ‘오로미아 커피농업인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들은 에티오피아 최초로 외국에 커피를 직접 수출하기 시작했다. 또 ‘유기농 재배’와 ‘공정무역’의 국제 인증을 받아 브랜드 파워를 과시했다. 이 조합은 조합원 10만명, 연매출 150억원의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조합원들의 수입이 늘어나면서 에티오피아 전역에서 가입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이들이 추진해 온 ‘공정무역’은 생산자가 제값을 받는 것 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인간다운 노동조건, 직거래, 민주적이고 투명한 조직 운영 등을 포괄한 개념이다. 아토코모릴이 사는 야부나 마을에선 오로미아 조합 배당금으로 수도펌프를 샀다. 어린이들도 대부분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뿌리 깊은 가난으로부터 탈출하기는 쉽지 않다. 마을의 원로인 메코넨은 “여전히 커피만으로 먹고살긴 힘들다”며 “커피밭 옆에 유럽 등에서 금지된 마약 성분이 들어 있는 차트나무를 심는 집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커피는 국제 원자재 시장에서 부피 기준으로 석유 다음으로 많이 거래되는 상품이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 서구인들이 재배를 강요한 ‘식민지의 작물’이었던 커피는 현대인들의 노동 생산성을 올리는 데 쓰이는 ‘착취의 열매’이기도 하다. 이런 유래는 공정무역 운동에서 커피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한가지 이유다. 오늘날 주요국에서 커피 없는 하루란 상상하기 어렵다.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라떼 혁명’ 뒤 테이크아웃 커피 시장은 해마다 10% 이상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커피 생산 농민들은 그 혜택에서 소외돼 있다.
메스켈라는 ‘착한 커피’ 사업의 중요한 목표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날마다 접하는 음료이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됐고 정당한 대가가 지불된 것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관심을 갖게 하는 게 우리의 일이다. 그런 관심을 갖는 이가 더 양심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란 점은 자명하다.”
메스켈라 커피 조합 대표 “진보와 연대해 전세계 체인점 만들것”
유기농 인증이 경쟁력 강화“한국도 농민 살리는 커피를”

» 메스켈라 커피조합 대표
타데세 메스켈라(사진) 오로미아 커피농업인 협동조합 대표는 에티오피아 커피의 ‘얼굴’이다. 1999년 이후 전세계 20여국을 누비며 공정무역·유기농 커피를 홍보하는 그의 열정에 반한 젊은 영화인들이 다큐멘터리 <블랙골드>를 만들기도 했다. 메스켈라는 “커피는 단순히 하나의 작물이 아니라 공정무역의 희망”이라며 “농민을 죽이는 커피가 아니라 살리는 커피, 제3세계와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커피를 사달라”고 호소했다.
-왜 커피인가?
=다른 게 없다. 커피는 에티오피아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에티오피아는 다른 커피 생산국과 달리 자국 생산 커피의 35%를 국내에서 소비할 정도로 커피가 사회에서 핵심적이다.
-조합 설립 배경은?
=농민들이 죽어가던 1999년에 설립됐다. 90년대 이후 신생 커피 생산국들의 생산량이 폭증하며 국제 커피값이 급락했다. 특히 커피를 생산하는 농민들은 중간 상인과 다국적 기업들에게 이익의 대부분을 빼앗겨 왔다. 다국적 기업들은 커피의 로스팅(커피 콩을 볶는) 과정 등에서도 우리를 철저히 소외시켰다.
-조합은 어떤 일에 주력해 왔나?
=에티오피아 커피는 모두 유기농 커피다. 기계 수확을 위해 숙성제를 치는 일부 나라와 달리 비료나 농약을 쓸 여유조차 없다. 이런 점 때문에 높은 부가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01년 독일에서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최근에는 커피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공정무역의 정의는?
=생산자가 적어도 생산원가 이상의 값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취지를 알리기 위해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영국 등 유럽 전역과 일본, 미국 등을 돌아다녔다.
-그동안의 성과는?
=우리의 커피는 공정무역, 유기농 프리미엄으로 다른 커피보다 훨씬 비싼 값에 팔린다. 전세계에서 공정무역 인증을 받은 커피 가운데 20%만 공정무역 가격에 팔리고 있다. 수요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커피를 팔고 얻은 조합의 수익은 배당금 형식으로 다시 농민들에게 간다.
-커피 값이 낮아도 이익을 남기는 경쟁자가 있는데.
=커피 값은 내려갔지만, 커피의 소매가는 변동이 없거나 오르지 않았나. 생산국 가운데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등은 커피가 주된 수출품이 아니어서 싸게 받아도 생존과는 상관이 없지만 우리는 다르다.
-다국적 기업들을 겨냥하는 이유는?
=이들은 당신이 마시는 커피 값의 가장 많은 부분을 가져간다. 맥스웰을 갖고 있는 크래프트와 폴저스를 갖고 있는 피엔지, 네슬레의 세 회사는 전 세계 커피의 60% 이상을 가공해 팔고 있다. 그 커피의 대부분은 농약을 치고 기계로 수확한 싸구려 커피다. 이들은 한두가지 단순한 조합으로 블렌딩한 뒤 비싼 값에 판매한다.
-앞으로 계획은?
=우리는 커피 산업이 단순히 원두를 생산해 파는 데서 ‘분위기를 파는’ 서비스 산업의 영역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전세계의 진보 세력과 연대해 세계적 규모의 커피 체인점을 만들고 싶다. 일단 2~3년 안에 로스팅부터 직접 시작하겠다는 계획으로 공장을 짓고 있다. 한국에서 가게를 열 사람은 없을까?
지마·아디스아바바/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내 아들은 돌아오지 않지만 참회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검은 대륙 희망 찾기 ① 학살에서 화해로 - 르완다
서수민 기자 김경호 기자


» 이웃앞에 선 가해자와 피해자 르완다 수도 키갈리로부터 40㎞ 떨어진 한 마을에서 전통 방식의 마을재판인 ‘가차차 법정’이 열리고 있다. 한 여인(왼쪽 손 든 이)이 가해자(오른쪽 선 이)에게 1994년 인종청소 당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연유를 묻고 있다. 키갈리/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기아와 에이즈, 내전, 학살로 얼룩진 검은 대륙 아프리카, 특히 사하라 사막 이남은 무서운 속도로 통합돼가는 세계의 바깥에 섬처럼 방치돼 있다. 그러나 불모의 땅에서도 소중한 희망의 싹은 움트고 있다. 검은 대륙에서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아프리카 민중들의 몸부림을 아홉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바로가기마을법정 통해 고백과 용서…인종청소 아픔 다독여
지난 7월 찾은 르완다의 자바나 마을. ‘천의 언덕 나라’라는 이 나라의 애칭이 무색하지 않게 두 시간 동안 산과 언덕들을 넘자 숲속의 조그마한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도 키갈리에서 40㎞ 떨어진 이곳의 마을회관에선 르완다 전통 방식의 마을 재판인 ‘가차차 법정’이 열리고 있었다.

여느 법정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판사는 푸른 면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30대 청년이었다. 검사와 변호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전 10시반께, 분홍색 수의를 입은 피고인 앙투안 루고로로카가 들어섰다. 후투족인 앙투안은 13년 전 같은마을에 살던 12살 투치족 소년 장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장이 없어진 정황과 그날 앙투안의 행적을 잇달아 증언했다.
1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던 장의 어머니, 발레리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 아들의 대부였어요. 당신을 좋아하던 그 아이를 왜 죽였나요?”
“나도 그때 무서웠어요. 믿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투치족 아내를 뒀던 저도 위협했어요.” 앙투안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가 부인을 잃고 마음고생이 컸다.” “그는 인종청소 초기부터 마을의 투치족들을 공격했다.” 증언이 엇갈렸다.

1시간 뒤, 판결을 앞두고 발레리가 다시 발언을 요청했다.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저주했어요. 그러다가 깨달았어요. 내 아들은 돌아오지 않지만, 당신은 여기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은 한때 나의 좋은 이웃이었다는 것을. 당신을 용서합니다.” 발레리의 표정은 담담했다.
1994년 르완다에서는 석 달 동안 97만명이 희생됐다. 아프리카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이 나라에서 학살은 다름아닌 이웃의 손으로 자행됐기에, 나라의 미래는 극도로 암울해 보였다.
하지만 13년이 지난 2007년, 르완다는 아프리카 인종 화합과 번영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다. 2001년 르완다 정부는 당시 사법제도로는 10만명에 이르는 피의자 가운데 3분의 1도 재판을 받지 못한 채 감옥에서 숨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2001년 가차차(잔디가 깔린 마당이라는 뜻)가 부활됐다.

가차차에서 죄를 자백하고,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받은 가해자는 파격적으로 낮은 형량을 선고받는다. 이날 앙투안은 그동안 감옥에서 보낸 12년을 고려해, 6개월 사회봉사형에 처해졌다. 사회봉사형을 받은 이들은 피해자들의 집을 지어주거나 도로를 보수하게 된다. 며칠 동안 인종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캠프에도 참여해야 한다.
가차차의 힘은 지역사회에 있다. 참여자들은 증인, 가해자, 피해자 구분없이 함께 당시 상황을 논의하며 집단적 기억을 유도한다. 대통령 직속기구인 국가통합화해위원회의 파투마 은당기자 위원장은 “서구식 법정에서는 가해자가 결코 자신에게 불리한 발언을 하지 않는다”며 “가차차에서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로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용서와 자비를 베풀게 된다”고 말했다.

투치족 정부는 이 밖에도 △후투족의 국방장관 등 주요 관직 기용 △노인과 젊은이에 대한 대대적 사면 △감옥내 외국어 교육 등 다양한 방법으로 후투-투치 화합을 유도하고 있다. 집중적인 역사 토론은 후투족과 투치족 분리정책 자체가 식민지 세력에서 강요한 일이며, 르완다의 전통과 무관하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끌어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르완다의 뿌리깊은 인종 갈등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도 귀향을 꺼리는 난민들이 인근 콩고와 부룬디·우간다에 남아 있다. 가차차의 결과를 둘러싼 갈등도 끊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언론인 제임스 무니아네자는 “지난 세기 잔혹한 식민통치를 경험한 아프리카에서 인종 갈등은 대륙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이라며 “우리가 그동안 이뤄낸 작은 성과는 아프리카 대륙의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키갈리/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